lovers only
모기
데이터 다운로드를 시작한 건 새벽 4시 45분경. 나는 갑자기 방이 치우고 싶어져서, 방의 맨 끝쪽 맨 위쪽 구석부터 시작했다. 옷장 대신 쓰고 있는 책꽂이 윗칸의 엉성하게 개켜진 스웨터를 들자, 새카만 모기 한마리가 날았다.

며칠 전 고장난 (그리고 전자공학도의 명예를 걸고도 고치지 못한) 전자 파리채. 그 날 밤 내 귓가에서 위이이이잉 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, 난 하던 일을 팽개치고 밤 9시에 차를 끌고 산을 내려가 한아름 마트에서 전자 파리채를 사 온 참이었다.

이 자식들 며칠 동안 지 세상인줄 알고 다녔지. 오늘밤은 살육과 광란의 불꽃 축제를 열어주겠어. 하며 손이 닿는 곳에 전자 파리채를 놓고 자리에 앉았는데, 돌아오니 막상 잠잠해져 있었고 난 잊어버렸었다.

황급하게 새 파리채를 찾아 돌아오니 모기는 책꽂이의 다른 한 쪽에 막 착륙하는 중이었다. 아까부터 녀석의 움직임이 시원치 않다. 천천히 물결을 그리며 책꽂이의 벽을 따라 날다 어떻게 적당한 구석에 달라 붙는다.

요즘 며칠 밤공기가 급격히 차가워졌다. 열려진 창문 틈으로 날아 들어와 내 피로 영양을 보충하려고 했지만 실패. 그 와중에 창문은 닫혀버렸고 집안은 비어버렸다. 결국 포기하고 어두운 구석을 찾아 잠이 들었는데, 얼마 후 펄럭하고 주변이 환해졌다.

도망가야 겠다고 생각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.
힘없는 날개를 움직여, 느릿 느릿 간신히 벽을 찾아 달라 붙었다.

나는 조금 두근두근 하며 파리채의 버튼을 눌렀다. 삐이이- 작게 깔리는 전자음. 좁은 책꽂이 안에 붙어있는 모기의 바로 밑에까지 살그머니 들이 밀어 보지만, 움직이질 않는다. 할 수 없이 나는 탁탁 선반을 쳤고, 순간 모기가 내키지 않는 듯 벽에서 떨어지더니, 곧 파박, 파지직, 파란 불꽃이 튀고, 피이이이이- 하는 전자음이 더 강해졌다.

피이이이이-
작고 힘없게 울리던 그 소리가, 마지막 울음 소리처럼 들렸다면, 나는 역시 잠이 부족했던 걸까.

환한 불로 가져가 채를 확인해 봤다. 날파리와 달리 몸집이 있어서인지 아직 채에 까만 게 남아있었다. 혹시 기절만 한 채 껴 있는 건 아니겠지. 나는 확인 사살했다. 파직 파직 불꽃이 튀고, 오징어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.

그래도 모기는 채에 남아 있었다. 더러워. 나는 쓰레기통에 파리채를 탁탁 치고, 튀어나와 있는 봉지에 모기(의 잔해)가 붙은 면을 비벼댔다. 이 정도면 됬겠지, 하고 파리채를 드는 데, 어째서인지 그 까만 덩어리는 그제서야 내 발 밑으로 툭 떨어졌다.
by clair | 2009/08/09 13:14 | talk | 트랙백 | 덧글(23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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Commented by 검은사과 at 2009/08/09 13:19
놀러왔어요! 전 오늘 한아름 다녀왔답니다 ㅋㅋㅋㅋㅋ 근데 산이라니...혹시 웨스트플라토 사세요???
Commented by clair at 2009/08/09 13:52
안녕하세요! 전 버나비 마운틴에 살고 있어요~
코퀴 한아름 오셨으면 저희 집 근처까지 오셨네요 ^^
근데 웨스트플라토는 어딘가요? ;;
Commented by ExtraD at 2009/08/09 13:49
한아름마트가 전세계에 몇 개가 있는지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.

비정한 살육의 현장이건만 애처로운 마음마져 느껴지는 감상적인 글로 재탄생했어요.
Commented by clair at 2009/08/09 13:58
엄청 큰 체인인 것 같아요. 미국에선 H마트라고 하는 것 같던데 같은 체인이에요. 광역 밴쿠버에 제가 아는 곳만 해도 벌써 세군데나 있어요.
미국은 정말 어느 도시에 가도 H마트가 있던데요..ㅇ_ㅇ

글 올리고 나서 구글링 해봤는데 곤충은 다행히도 고통을 못느낀다고 해요.
그냥 '무언가의 생명을 뺏는다'고 생각하면 기분이 그렇고. 아 전 사실 늘 불쌍하게 느껴져서 orz 벌레 정말 싫어하고 무서워하는데 정작 죽이진 못합니다만 orz

대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저는 위선자...(....)
Commented by ExtraD at 2009/08/09 14:03
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죽음이 어떤 느낌일지..
(감각 기관은 있지만 '고통'을 느끼는 기관은 없다는 건가요?)
Commented by ExtraD at 2009/08/09 14:03
(오랜만에 동시접속. :-)
Commented by kristine at 2009/08/09 14:36
그렇군요.... 저는 한번도 안 들어봤는데 남부캘리에서는 잘 모르겠던데
Commented by clair at 2009/08/11 11:40
ExD님//
우왕 동접 *ㅅ* ㅋ

네 촉각은 있는데 고통을 느끼는 신경이 없데요.
고통없는 죽음은.. 잘 모르겠어요. 예를 들어 칼에 찔렸는데 숨을 쉬기 어렵다든지 정신이 혼미해진다든지 하지만, 아프진 않은 그런 거 아닐까요?

kristine님//
헐 Irvine에도 있다는데요.. kristine님이 계신 곳엔 없나봐요.
Commented by kristine at 2009/08/09 14:34
아버지가 관저에 사실때 예전에 한 여름에 모기를 그렇게 전기로 죽이는 기계가 있었어요. 원리는 일종의 형광등이라고 해야하나.. 무슨 등이 있는데 그 등에 모기가 날라오는거에요~~ 그러면 거기에 달아든 모기들은 정말 타는 소리와 냄새를 내면서 죽는데 저희 엄마가 손님오시는 경우가 아니면은 그것을 쓰는 것을 참 싫어하셨어요.
Commented by clair at 2009/08/11 11:42
아 알아요! 정원같은 야외에서 쓰는 거 말씀 하시는거죠?
네 그게 타는 소리랑 냄새가 정말 죽이죠 -_-
커다란 나방들이 막 날아와서 타 죽는 거 보면, 보기 싫고 착잡하고 그래요. 나방은 아무 죄도 없는데 말이에요..
Commented by 아크A-K at 2009/08/09 14:49
살육과 광란의 불꽃 축제...{{(ㅎㅅㅎ)}} 덜덜
외국 홈비디오에서 거기다 어떤 아저씨가 혓바닥 갖다대던데 순간 파지지직!
타이어버그 대비용으로 하나 갖고싶었는데.....냄새가 난다고?!......컥;
Commented by clair at 2009/08/11 11:46
ㅋㅋ 왠지 막 모닥불 피워놓고 북치면서 돌아야 할거같지 않냐 ㅋㅋ
그 전자파리채에도 '작동 중에 손대지 마시오' 라고 써있다. 무서워서 한번도 못 해 봤어.

타는 냄새가 나는 건, 단백질이 전기에 타면서 나는 냄새 같아.
모기가 타는 냄새인지, 모기가 빤 피가 탄 냄새인진 잘 모르겠어. 모기나 날파리들한테만 시도해 봤는데, 솔직히 큰 벌레들은 무서워서 못할거 같더라 ㅠㅠ ㅠㅠ ㅠㅠ 어흑 그거 어떻게 봐 ㅠㅠ
Commented by yjham at 2009/08/09 16:31
좋네요 이런 글
Commented by clair at 2009/08/11 11:47
감사합니다~ ^^ 기뻐요.
Commented by nadia at 2009/08/10 02:03
전자 파리채,저도 있지만 - 지역이 제주도라서-역시 순발력부족으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어요. 그대신 푸른불이 나오는 살육기계를 쓰는데(윗분처럼) 모기가 부서져서 책상위로 떨어져내려서 싫어요. 그냥 공존하고 싶지만 자꾸 아기만 물어서,,
Commented by clair at 2009/08/11 11:50
ㅎㅎㅎㅎ 이건 별로 순발력 필요 없던데요! ㅋㅋㅋㅋ
음 푸른불이 나오는 살육기계 효과가 있긴 있나보네요. 근데 그런 것 실내에서도 쓸 수 있는 줄 몰랐어요.
저는 어렸을 때 엄청난 양의 홈매트를 쓰며 자랐는데, 그래도 화학약품 없는 게 역시 좋은 것 같아요. 모기장이 제일 좋긴 한데, 잠 잘 때나 칠 수 있으니까 좀 아쉽죠.
Commented by Beatriz at 2009/08/10 07:51
어머나 곤충은 정말 고통을 느끼지 못하나요?
Commented by clair at 2009/08/11 11:52
그렇다고 하네요!
(인터넷에서) 그 설명을 한 글쓴이의 말로는, 곤충의 다리를 잡으면 요동을 치겠지만, 다리를 떼버리면 차분하게 걸어간데요 -_-;;;; 그러니까 만지는 건 느끼지만 고통을 못 느낀다는.

근데 약 뿌리면 왜 요동 치는지 모르겠어요. 정말 엄청나게 고통스러워 보이잖아요 ㅠㅠ
Commented by 검은사과 at 2009/08/10 09:27
버나비사시는구나..전 코퀴틀람이요 ^^;;;; 내일모레면 뉴욕으로 떠나네요..
Commented by clair at 2009/08/11 11:53
헉 그럴수가
ㅇ_ㅇ 아예 가버리시는 건가요! 밴쿠버 이웃 한분 늘었다고 좋아했는데 전.
Commented by sunho at 2009/08/11 16:20
그깟 캐나다 모기를 잡는데 전기 파리채라니, 사치가 심하셔요 ㅋㅋ
Commented by clair at 2009/08/12 06:28
왠지 까매서 더 무섭던걸요;
게다가 조용해요!;;; 보기 전까진 모를때도 있어요.
Commented by 쿨짹 at 2009/08/20 04:22
ㅋㅋ 선호군과 히샤님 클레어님은 페북에서 직접 초대하려고 했었는데. ㅎㅎ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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